라이프로그


국경버스에서 일어난 일 여행


라오스 방문은 15일 노 비자다. 그래서 방문 후 그 이상 체류를 하려면 15일 지나기 전에 이웃 나라를 다녀와야 한다. 이른바 바자 크리어를 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메콩강 건너 가장 가까운 태국의 농카이를 갔다 오려고 아침 7시에 국경을 넘어가는 국제버스를 탔다.

 

출발 시간이 되자 버스는 출발을 한 뒤에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차 사이를 지나 버스로 다가오더니 문을 열어 달라고 버스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차림새와 인상이 조금 어눌해 보인다. 그래도 명색이 국제 버스인데 동네 마을 버스 타듯이 차도 가운데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 그사람의 태도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놀랍게도 버스 운전사는 문을 열어 준다. 국제 버스는 매표를 할 때 여권을 제시하고 기록까지 전부 하는데 표를 끊은 뒤 어디를 갔다 왔는가 궁굼한 생각이 든다. 문이 열리자 그사람은 냉큼 올라타고는 마침 사람이 없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내가 매표를 할 때는 좌석 까지 지정이 되던데 이 사람은 주저 없이 앉는 것을 보니 원래 내 옆자리 손님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 사람과 시작된 인연, 아니 대화는 국경을 넘어가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사람은 라오말로 하고 나는 한국말로 하는데 서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서로 간에 의사가 전달 되는 점이다.

 

내가 처음 이 사람이 알아 듣던 말든 한국말로

잘 못했으면 못 탈 뻔했네

라고 하니 그 사람은 웃으며 라오말로 뭐라고 대꾸를 한다.

, 대화가 되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나갔다.

 

좀 빨리 다니지 그랬어?”

여기서 경칭은 어차피 필요가 없으니 내 편한 대로 하대를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또 무어라고 대꾸를 한다.

 

메콩강을 건너며 계속된 비에 불어난 강물을 보고 내가

강물이 많이 불었네라고 하니 그는 또 무어라고 라오말로 답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라오사람인지 태국 사람인지 구별이 안가서

당신 타이사람이야?” 물어보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라오그런다.

! 라오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한 나는 다시

타이에 갔다가 오늘 다시 오나?”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 나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 거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서로 대화는 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얘기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해 조금 아리송해 진다.

그렇게 대화 아닌 대화를 하며 가다가 이것도 인연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바꾼 뒤

우리 사진 찍을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우리는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는데 조금 웃기기는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영어로

유 재패니스?” 라고 한다.

순간 ? 영어도 하네라는 생각을 하며 그 때 까지 이 사람이 조금은 어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이 확 바뀌는데 영어 발음도 나보다 훨씬 세련되게 들린다.

 

나는 당황해서

, 아이 앰 코리안

하니 그 사람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엄마야 이 일을 어쩐다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리틀

내가 선수 앞에서 계속 고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순간 공자님인가, 맹자님이 한신 말씀이 생각난다.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그런데 이 말이 그분들이 하신 말씀이 맞긴 하나?

 

그 뒤부터 나는 잔뜩 저자세가 되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물어 볼가 봐 창밖만 바라 보는데 다행이 별 질문은 안한다.

우리는 한세상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 사람의 팔자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했는데 오만방자한 생각 때문에 이역만리에 와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 사람은 참으로 마음이 깊은 사람인가 보다. 나의 다소곳해진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발동했는지 더 이상 나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데 나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이제 목적지도 다와 가는데 헤어지면서 그동안 대화를 나눈 정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하던대로 한국말로 해야 하나 아니면 짧은 영어라도 멋진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 한 것이다.

그런데 문득 옆에 앉은 그 사람의 손을 보니 엄지손가락 부분에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데 실밥이 겉으로 많이 나와 있다. 무언가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가리키며

웟 해픈?”

어설픈 질문을 하니 그 사람은 그래도 알아들었는지 다른 손도 가리키며 무언가 한참을 설명을 한다. 그 손도 정상이 아니다.

! 그래서 아까 출입국 관리소에서 차 문을 열 때 자기 손으로 문을 열지 못하고 나한테 양보를 했구나

그 순간 내 마음이 아파 온다. 역시 잘 나가거나 정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무시를 한 것이 아닌가하고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졌다.

 

태국의 농카이 버스 스테이션에 도착 한 뒤 차에서 내리며 나는 간단한 인사를 했다.

“Stay healthy and happy!”

그러면서 그 말이 맞는 말인가를 걱정하기 보다는 내 진심이 제대로 전해 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방비엥의 나두왕 학교 라오스 라오스

7월 8일 아침 8, 시청각교재를 방비엥의 나두왕 학교에 전달해 주러 가는 날이다. 지금 라오스는 우기이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온다. 그런데 전에는 주로 밤에만 오고 낮에는 비가 별로 오지 않았다는데 금년은 낮에도 비가 많이 온다. 아마도 지구촌 이상 기후 현상이 라오스에도 찾아온 것 같다는 얘기들을 한다.

 

시청각교재 전달은 교실에 설치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비가와도 큰 지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학교에 오거나 짐을 싣고 내리는데 조금은 불편할 것 같다. 우리는 이번 행사에 동참의사를 표시하여 해충 퇴치품을 준비 해준 라오스 주재 ()팜클에 들려 후원품을 싣고 방비엥을 향해 출발을 했다.


우리 차는 라오스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조대성 사장이 본인의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그의 친동생이 이번 일을 도와주기 위해 동행을 하고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 조대성 사장은 이번 행사품인 프로젝터와 노트북등을 구입하는데 낯선 곳에서 엄두가 안 나는 나를 구입 상점과 길 안내를 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행사를 진행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방비엥 가는 길가의 풍경은 옛날 우리나라 6, 70년대의 지방도로 같은 분위기가 있어 마음이 푸근하다. 더구나 오늘은 버스가 아닌 승합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가며 사진도 찍을 수가 있어 운전하는 사람은 불편하겠지만 비 오는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은 제법 낭만 스러운 분위기도 난다.





4시간 거리 중 반 정도를 가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비가 내린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는 도중 가끔 집중폭우가 쏟아져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마침 우리 앞에 짐을 높다랗게 실은 커다란 트럭이 조금은 위험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저렇게 많은 짐을 싣고 어디에 가는 차인가 물어보니 조사장은 중국까지 가는 차라고 설명해 준다. 중국 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점점 험해지는 산길을 저 많은 짐을 싣고 빗길에 먼 길을 가야할 트럭의 앞 여정이 자못 걱정스럽다 





방비엥 도착시간이 11, 방비엥 시내에 도착하니 비가 상당히 많이 온 듯 남송강 강물이 많이 불어 누런 황토색 물이 노도처럼 흘러간다. 물살이 너무 세어 강에서 하는 카야킹이나 모터보트, 튜빙등의 아웃도어 투어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우리가 가는 나두왕 학교의 전선생과는 4시에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여 시내 숙소에서 잠시 쉰 뒤 시간에 맞추어 마을로 출발했다. 세찬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다행인데 가는 길의 비포장도로에는 물 웅덩이가 많아서 차가 가는데 조심 스럽다.

 

학교에 도착하니 전권기 선생과 학생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승합차에 실은 짐들을 내려놓고 간단한 전달식을 가졌다.

요란한 겉치레가 싫어서 생략하려고 했지만 후원해준 분들을 생각해 기록은 남겨야 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곳은 한창 모내기를 하는 시기다. 우리나라처럼 기계로 모를 내지 않고 전부 손으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 식구들이 총동원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어린 동생들을 엄마대신 하루 종일 돌봐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 올 때도 어린 동생을 업고서 온다. 선생님도 그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전부 묵인을 해주고 그렇게라도 학교에 오는 어린이들의 성의를 칭찬해 준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제 교실 안에서 본격적인 설치 작업에 들어갔다. 스크린을 벽에다 거는 작업도 만만치가 않아 만약 나 혼자 왔다면 포기하고 그냥 물건 만 전해 주고 돌아갈 번 했다.

앞에서는 프로젝터를 노트북에 연결하여 시연을 하는 작업을 하고 벽에는 스크린 설치작업을 하느라고 더운 실내에서 땀들을 뻘뻘 흘리는데 뒤에서는 아이들이 촘촘히 앉아 어른들의 작업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주시를 하고 있다 





옛날 1950년대 6.25전쟁이 나고 얼마 뒤 수복된 서울은 지금 라오스의 시골 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가끔 학교 운동장에서 흑백 영화를 틀어 주었다. 그러면 입소문 듣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그 당시 생각나는 영화중 재미있게 본 것이 타잔 영화다.

그때의 감동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어린 우리들은 어떠 했을까 짐작이 간다. 지금 이 라오의 시골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른 후원물품보다 오랜 기간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이들 어린 학생들 뿐만 아니고 이 마을 영화관 노릇도 톡톡히 할 것이라는 예상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시청각교육 교재는 그냥 한번 던져주고 가는 선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틀린 생각이 아니기를 기대를 해 본다.





뒤에서 빼곡히 앉아있는 어린이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니 어린애기를 앉거나 업고온 아이들이 뜻밖에도 많았다. 지난번에 답사 왔을 때도 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많이 보인다. 엄마들이 농사일에 무척 바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이런 일이 몸에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표정들이다. 우리 옛날과 어쩌면 이렇게도 똑 같을까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은 이곳 라오스에 오면 옛날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고향에 온 듯 편안하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래서 별로 볼 것이 없어도 자꾸 오게 된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이런 마음을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고생스럽던 기억이라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보면 다 아름다운 수채화로 변한 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동감하는 이야기 들이다.

 

! 이 아이들이 먼 훗날, 나처럼 지금의 영상들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방비엥의 작은 학교 라오스 라오스

▼  방비엥 시내의 모습이다. 방비엥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라오스의 작은 계림이라고 불릴만큼 산수가 아름다운 조용한 마을이다. 방비엥에서 6km정도 떨어진 아주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작은 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아침 9시반 비엔티안을 출발하는 여행사 버스에 몸을 싣고 두사람이 길을 떠났다.
한국같으면 2시간이면 갈 거리를 도로사정상 3시간 반이 걸렸다.



▼  방비엥에 도착한 뒤 학교를 운영하는 전권기 선생과 통화를 하여 여행사 앞에서 만났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라오스에 온지 10년이 넘었는데 라오스 부인과 결혼 한 뒤 도시를 떠나 라오스 시골로 들어와 어린 학생들과 같이 생활 한다는 설명이다.



▼  방비엥은 한국의 TV의 "꽃보다 청춘" 이라는 프로에 소개 된 뒤 젊은 배낭족 들이 구름 처럼 몰려오는 곳이다. 서양 젊은이들도 많이 오는데 그래도 한국젊은이 들이 대세다. 액티비티한 투어가 많아 여행사를 통해 장년층들도 상당히 많이 오기 시작해서 거리는 온통 한국 사람들 물결이다.
새노래방, 김밥등 한국말 광고 문구등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아래 집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K-마트다.



▼  학교의 학생수는 40명 정도, 빈손으로 가기가 섭섭하여 동네의 가장 큰 가게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준비 했다.



▼  방비엥 시내에서 학교가 있는 마을 까지는 거리가 6km정도인데 비포장 도로로 트럭을 개조한 이동네 간이 버스를 빌려서 타고 가는데 상당히 흔들린다. 그바람에 뱃속의 내장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도착해 보니 학교 건물은 15평짜리 교실이 달랑 하나, 학교라기 보다는 창고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이것도 독지가가 지어 주어주고 계속적인 후원을 하기로 했는데 개인 적인 사정으로 지원이 끊겨 후속사업도 중지되었다고 한다.



▼  학생들이 이용하는 지하수인데 먹어도 되냐고 하니 우리는 먹으면 안되고 이곳 아이들은 먹어도 된다고 한다.  이곳 지하수는 식용으로는 부적합한데 정수 시설이 어려워 급한대로 먹다보니 적응력이 생겼다는 얘기 인데 그렇다고 몸에 안좋은 물이 좋아졌다는 건 아니다. 만약 우리나라 학교에서 이런 물을 어린 학생들에게 먹게 한다면 얼마나 난리를 칠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우리 어릴때도 마찬가지 였었는데 당시엔 물의 성분 같은 건 신경도 안썼다.   

"아! 정수시설"  우리가 먹으면 큰일 나는 물을 이 어린애들은 날마다 먹고 있다.




▼  왼쪽 자동차는 우리가 빌려 타고 온 이 마을의 버스 역활을 하는  트럭이다. 지금 이곳 라오스의 학기는 방학중인데 이 마을의 학생들은 오후 방과 후에 공부를  하러 나온다고 한다. 과목은 한글과 영어로 학생들이 집안 일을 돕는 가운에도 향학열이 상당히 높은 편인데 이 곳은 정식 학교가 아니고 한국의 보습학원 정도로 전선생이 그의 부인과 같이 무료로 봉사를 하는 곳이다.



▼  교사 옆에 텃밭도 만들었다.



▼ 손바닥 만한 마을에서  외국 손님들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평상시 안 오던 어린이들도 구경삼아 구름(?)처럼 몰려 온다.



▼  교실 안을 살펴 보자!



▼  책상 대여섯 개가 전부인 교실, 칠판도 편리(?)한 이동식이다.




▼  손님이 왔다고 청소중인 학생들, 청소하는 모습이 참 엉성하기 짝이 없다.



▼  "자! 모두 교실로 들어가자!"  선생님의 지시에 교실안으로 들어가는 학생들,


▼  어린 동생을 안고 궁금해서 학교를 찾은 학생도 있다.


▼  이곳은 교실 안과 밖이 모두 학습장이다.



▼  한글 수업





 

▼  우리가 가지고 온 과자와 음료수에 어린이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  자! 정돈합시다. 손님들 오셨어요



▼  신발의 상황이 상당이 심각하다. 그래도 군소리 안하고 신고 다닌다.




▼  즐거운 간식 시간, 선물이 너무 부실하여 나누어 주는 내가 민망하다.




▼  싸구려 과자봉지 하나 앞에 놓고 감격해 하는 아이들을 보니 코허리가 시큰해 진다.



▼  불청객들이 많아 준비한 과자가 부족하다, 급히 동네 가게에가서 긴급 보충, 시내보다 가격이 많이 비싸다. 한가하던 가게에 큰손님이 갑자기 들이 닦치자 가게를 보던 어린 주인이 쩔쩔맨다.



▼  뒤 늦게 못 받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니 받는 아이들의 표정이 참 묘하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나?

이 아이들을 위해 이 학교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계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들을 이런 환경에서 완전히 구해 줄 수도 없다. 옛날 6.25 사변후 UN과 미군들의 구호 물자를 받었던 기억이 생생한 나는 이제 세월이 한참 흐른뒤 이들 앞에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

고민 끝에 물질 보다는 정신적인 희망을 주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들어 전선생과 얘기를 하다 보니 그도 빔프로젝터 얘기를 언듯 비친다. 너무 부담이 많이 될 듯해서 그러는지 꼭 지목해서 얘기는 못한다.

책상 걸상 보다는 어린학생들에게 급진적인 사고의 변화를 불러 올 수 있는 문명의 이기가 바로 영상교육이다. 돌아와서 한번 계획을 짜보기로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상교재는 학교의 학생 뿐이 아니고 이 동네의 훌륭한 영화관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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