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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폭군인가 현군인가? 역사의 현장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離宮이었다. 1617년(광해군 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년)에 완성하였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을 맞게 되는데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경희궁의 대부분 건물이 헐려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서울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곳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치욕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나의 힘이 약하면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지극히 간단한 교훈을 우리는 또다시 망각한 채 현세에도 오류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경희궁을 광해군 시대에 지었다는 내용을 알고 처음에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 하면 연산군과 같은 폭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궁궐을 지을 정도의 생각이 있는 왕이라면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아 광해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나는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더불어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근래에 상영되었던 “광해 왕이 된 남자” 라는 영화가 광해군에 대한 영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광해군은 비운의 왕이다. 반대파에 의해 숙청을 당하면서 잘한 부분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못한 부분만 극대화시켜 폭군으로 만들어버린 역사의 오류,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런 오류 부분이 너무 많다.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왕이 된 인조의 치적은 과연 광해군과 비교해서 어떠했는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을 서자 출신이라고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던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급하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매듭짓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分朝란 조선을 나눈다는 의미다. 선조가 만약 나라가 더 위급해져 중국으로 도망을 가버리면 조선은 임금이 없는 나라가 되고 백성들은 왕이 없는 나라에서 외적과 싸워야 되는 처지가 된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제2의 왕 역할을 하라고 광해군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은 자기만 살자고 중국으로 도망을 가고 대신 자기 아들인 광해군을 조선 땅에 남게하여 백성들과 같이 죽던지 말던지 하라는 참으로 나라의 왕이나 부모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조차 망각한 처사인 것이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는 18세의 어린 나이, 그러나 분조의 책임자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는 왜군을 쫓아 충청도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까지 내려가 분조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를 했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갈 때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웠다. 그런데 백성들은 다른 왕자들의 궁은 불태우면서도 광해군의 궁만은 불태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분조 활동은 광해군 일기에 상세히 기록을 하였는데 인조반정후 그의 일기는 완전히 각색이 되어 내려온다.

 

광해군은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왕이 되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 씨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채 1600년에 사망을 하였고 1602년에 19세의 인목왕후 김 씨가 정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이른바 적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세자에 책봉되고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이제 갓 태어난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세력은 이런 상황에도 세자가된 광해군을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세자로 인정을 하지 않고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노린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은 광해군파와 영창대군파로 나뉘어서 왕위계승권을 놓고 당파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더해 중국에 사대하던 당시의 조선 왕실은 세자, 왕비 책봉 등에 관해서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세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심 광해군을 폐 세자 시키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올리려했던 선조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결국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신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광해군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계속해서 일어나 광해군은 집권 초기부터 불안한 왕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는데 계속적인 도전에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왕권 보전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사사건건 광해군의 일에 반대를 하던 영창대군파의 유영경이 선조가 죽은 뒤 한 달이 못되어 처형되었고 잦은 옥사로 소북인사들이 대거 축출되는 등 정국은 혁명정국과도 같은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그런 가운데 1613년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범인 일당은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로 자신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컫는 무리였다. 그들은 적서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적질 등 악행을 일삼던 중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광해군파는 그들에게서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사실과,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사건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어 얹는 꼴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시작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614년 봄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증살(蒸殺) 시켰다. 8살의 어린나이로 조선 초기 단종의 죽음과도 비견되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이 사건은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옥사라고 한다.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를 잃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원수로 여긴 것은 자명한 이치였고 이러한 분위기로 인목대비와 광해군이 한 궁궐안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광해군은 1615년 추운 겨울 인목대비를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를 시킨다. 이것이 후일 광해군의 죄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다

 

1613년의 계축옥사를 계기로 광해군은 왕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면서 정치적 부담을 없앤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에 대한 반대세력을 암암리에 결집시키는 확실한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지만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반대파는 성리학의 의리론과 명분론을 바탕으로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전파하면서 세력의 확산에 들어갔고, 남인들 역시 서인의 입장을 지원하였다. 파벌과 당쟁은 무서운 것이어서 이이와 이항복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서인들은 비밀 회합과 함께 군사력을 확충시켜 나갔으며 마침내 역모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서인들의 집념은 너무나 강해 계축옥사가 일어난지 10년이나 지난 1623년 3월 13일 홍제원에 모인 서인 중심의 반정 세력은 마침내 창의문을 넘어 창덕궁을 습격하여 광해군을 몰아냈다. 이때 개울물에서 칼을 씻고 출발을 한 이 지역 이름을 후에 세검정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인조반정인데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6월 25일 조선의 15대왕인 광해군은 폐위 되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정말로 폐위될 정도의 폭군이었나?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인식되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우리는 해봐야 한다.

인조반정을 뒤집어 보면 임금이 반역을 도모한 신하를 처벌한 것은 큰 죄악이 되고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명분하에 신하가 임금을 폐위시킨 것은 잘한 일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는 승리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데 조선왕조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광해군 뿐만 아니라 역대 모든 왕들은 왕권을 위해서는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척결을 하였다. 그 예를 보면 태종임금이 있고 세조임금의 경우도 있다. 그리고 나중에 아들을 죽이고 손자까지 죽이는 인조가 있고 또 영조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폐위가 안 되었을까?

 

결국 광해군의 폐위는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15년간 재임 중 광해군의 치적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나라 후금은 빠르게 성장해 점점 영토를 확장해갔다. 그리고 결국 1618년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해 함락한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요구하는데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군 파병을 미루다가 1년이 지난 뒤에야 강홍립 장군에게 1만의 병사를 딸려 파병하면서 형세를 보아 적당히 버티다가 명나라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 후금에게 항복하되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명나라에 군사를 보냈음을 이해시키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 결과, 명과 후금 두 나라에 불만을 사지 않고 아무런 마찰 없이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참으로 적절한 실리 외교라고 하겠다.

 

이런 실리 외교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반대파 대신들은 뒤늦은 파병과 또 지원군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에게 성의를 보였다고 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맹비난을 한다. 그들은 과연 조선의 신하인지 명나라의 신하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이다.

 

당시 광해군의 양다리 외교는 고도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명나라가 전쟁에서 밀리자 광해군의 지시로 후금에게 의도적으로 항복한 조선군은 7년간 후금에 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동안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군 군사들은 새로운 강국인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때 수집한 정보를 활용하여 광해군은 후에 병사를 훈련시키고 후금의 기마병들에 대항하기 위한 화포와 전차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은 서인들에 의한 반역이 성공을 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마는데 당권에 눈이 먼 반대파들은 집권을 하자 첫 번째로 한 일이 광해군의 심복으로 최전방에서 국토방위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을 하던 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을 죽이는 일이었다. 당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방을 무너트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 에서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일인가?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 노선을 폐기하고,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청(후금)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오랑캐들에게 굴복한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찧어 이마가 피투성이가 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였으며 국가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발생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광해군이 얼마나 현명한 왕이었고 인조가 얼마나 무능한 임금이었나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다.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는 병자호란을 그린 영화다. 후금에게 침략 당한 후 끌려가는 많은 백성들, 특히 아녀자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엔 50만 명의 부녀자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끌려간 부녀자들의 수가 그러할 진대 남은 백성들의 참상이야 어떠했겠는가? 그 당시 인구 비례로 보면 젊은 여자들 50만명은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가 짐작이 간다. 만약 지금 시대에 젊은 여자 50만 명이 중국이나 일본과의 전쟁에 패해 강제로 끌려 갔다면 얼마나 큰 일이겠는가?

 

바람피운 여자를 뜻하는 '화냥년' 이라는 욕은 이 때 끌려간 부녀자들이 고생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다. 오랑캐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돌아온 이 여인들은 손가락질 하는 냉대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목을 매 자살하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모진 고생 끝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조선 여인들은 목을 매거나 매춘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

 

이런 비참한 상황을 만든 인조와 서인 정권의 사람들, 그들은 광해군만 폐위시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만약 광해군이 계속 집권을 했더라도 그런 일이 벌어 졌을까?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누구를 현군이라고 부를 것인가? 결국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저지른 일들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서인들이 역모를 꾀한 진짜 이유는 폐모살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대동법에 있었다. 즉 밥그릇 싸움이 큰 이유인 것이다.

조선시대 농민이 국가에 부담하는 대표적인 세금은 토지에 대한 세금인 전조(田租)와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이었다. 공납은 농민이 호별(戶別)로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것인데 관청의 서리들이 중간에 개입하여 필요한 특산품을 미리 사들였다가 토지가 없거나 특산물을 생산하지 못한 농민에게 비싸게 받아내는 방납(防納) 혹은 대납(代納)의 폐단이 컸다.

 

임진왜란 후 공납제의 폐단은 더욱 커져서 호피(虎皮) 방석 1개의 대납 가격이 쌀 70여석이나 면포 200필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망국의 전조라 생각한 광해군은 전란 후 피폐된 나라를 재건하고자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토지조사 사업과 백성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세제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광해군은 1608년 왕위에 오르자 공납제도 개혁에 착수하였다.

 

광해군의 구상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다. <광해군일기> 에는 광해군 즉위년 5월 7일에 대동법을 추진할 기관으로 선혜청을 설치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원익은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특산물이 아닌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고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 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여야 한다”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에 처음으로 대동법을 실시했는데 대동(大同)이란 용어는 신분적 차별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으나, 지주와 중간 상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광해군 집권 중에는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것은 오늘날 철도노조의 파업을 연상케 하는데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지주들의 저항, 산간 지역이나 해읍(海邑)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 등으로 여러 차례 논란에 부닥쳤다. 대동법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꼭 실천해야할 세법이지만 기득권을 주장하는 세력들 때문에 세법으로 정착하는데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광해군의 개혁 정책에 의해 불안을 느낀 서인 정권을 중심으로 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 들이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는데 반대파들은 1613년의 계축옥사를 계기로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고 거사가 성공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자마자 광해군이 시도하였던 대동법과 대외정책 등 백성을 위한 모든 개혁정책을 백지화 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얼마나 폭군이었고 얼마나 현군이었나를 비교해 본다.

광해군이 한 일들은

1. 백성을 위한 대동법 실시

2. 산업 부흥을 위해 토지대장(양전)과 호적대장 정리사업 실시

3. 국방력강화를 위해 성곽, 무기수리, 군사훈련강화

4. 중립외교를 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도모

5. 동의보감 편찬 등을 그의 대표적인 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왕에서 쫓겨난 이유는 세 가지 죄목으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인조실록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고 후금과 내통을 한 배은망덕한 자라는 것이다. 당시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하느라고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광해군의 대단한 능력을 파렴치한 배반자로 치부하고 있으니 그들의 안목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는 죄목이다.

당시 광해군의 가장 큰 고민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이었는데 출신의 약점을 잡고 흔들어대는 반대파의 기를 꺾기 위해서는 궁궐공사를 여러 차례 하면서 무언가 강력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이후 광해군은 대동법등 정치개혁을 시행해 나간다.

 

세 번째는 폐모살제(廢母殺第) 즉 나이가 9살이나 어리지만 어머니 격인 인복대비를 폐위시키고, 아홉 살 난 동생 영창대군과 역모 죄로 인목대비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대목인데 그런 이유라면 조선의 임금들 중에 왕권에 도전한 반대파들을 너그럽게 용서한 왕들이 있었던가? 역모는 삼족을 멸한다고 할 만큼 가장 큰 죄목으로 생각하던 당시에 폐모살제는 광해군 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광해군 파에서는 왕권을 위해서는 정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패륜의 행위라고 매도하던 그들 역시 광해군이 보는 앞에서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다 죽여 없앴다. 이런 일은 패륜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즘 하는 얘기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란 말인가?

 

일반 백성들은 참으로 단순하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지만 사실은 일반 백성들은 스스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그저 책에서 본대로 배운 대로 믿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나 또한 광해군 에 대한 인식을 책에서 배운 대로 믿어 왔지 않았던가?

우리가 광해군 에 대한 평가를 할 때 한참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폭군인가 현군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비운의 왕이라는 것에 대해서만은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덧글

  • 근데 2014/02/21 21:05 # 삭제 답글

    영창대군 증살설은 근거도 없는 말입니다.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 '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광해군 일기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증살로 죽어서 강화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하죠.


    하지만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이 이정표를 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몰래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의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정항이 아닌 이정표가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조실록의 내용이 영창대군의 비문에도 적히게 되었죠.

    그리고 여기서 강화 사람들이 또 슬퍼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영창대군이 여러번 죽어서 슬픈가 봅니다(...)

    거기다가 인조와 서인정권들도 정항과 이정표에 대한 처벌을 금하고 공식적으로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소문만 믿고 둘을 처벌해선 안된다 라고 합니다.(...)

    이러다보니 영창대군 살해설 자체를 인조와 서인정권의 왜곡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 궁금합니다광해군 2014/04/02 14:36 # 삭제 답글

    "광해군은 너무 과대평가된 인물입니다. 중립외교설로 현군으로 이미지가 각색된거지만 정작 중립외교설은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광해군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무고하여 퍼트린 반정명분이 오늘날 중립외교로 재평가된 것에 불과합니다.대동법은 광해군이 추진해 입법된 제도가 아닙니다. 이미 공납제 폐단에 대한 문제점 인식으로 쌀로서 세금을 내는 제도가 고안, 실행된바 있으며(대공수미법), 개혁적인 관료들에 의해 몇세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도입 실현되어온것 뿐입니다. 광해군때 첫 시범으로 경기도에 국한해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인조때 강원도, 효종때 충청도와 전라도, 숙종때 경상도 등으로 단계적으로 확대 시행되었습니다. 그나마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대동법 시행 요구에 경기도에서만 국한해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죠." -지식IN vulture2083 님의 덧글

    이런말도 있어서 어떤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
    광해군이 재위기간 동안 있었던일을 객관적으로 써놓은책은 없나요 ?
    광해군 일기나 실록 같은 것 말구요..
    사람들마다 책마다 의견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혼란스럽네요 .
  • 무웨로웅 2014/07/02 21:52 # 삭제

    참 나, 전에 있던 낡은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거나 좋은 제도들만 골라내는 것이 쉬운 줄 아나. 그럼 왜 대통령들은 왜 욕 먹겠냐. 당신 말대로라면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다 위인 되어 있고 아직도 국민들은 새마을 운동하고 있겠지. 이렇게 작은 일인데도 얼마나 반대도 심하고 욕도 많이 먹는데..... 저 정도도 대단한 거지. 지금 보면 쉬운 듯 하지만 완전히 잊혀져 있던 제도를 찾아내고 활용하는 게 얼마나 힘든디....아직도 그걸 모르다니....ㅉㅉㅉ 당신 말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초강대국이 되어 있어야지 왜 이러는데.....그니까 광해군이 대단한 거지. 글고 솔직히 광해군보다 더 잔인하고 독재 정치 펼친 왕들도 있었는데 왜 그 왕들은 폐위 안 됨? 광해군은 분당정치의 희생양이라구. 정치도 매우 잘했고! 솔직히 지금 국민들 중 90%는 왕 돼도 광해군만큼은 못 할걸....그니까 함부로 한 시대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고!!!지도자는 아무나 하나....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그니까 함부로 평가할 자격이 없지......
  • 돌단풍 2015/01/09 13:13 # 답글

    광해군은 지금 연산군과 더불어 2대 폭군으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폭군 취급을 받는 것을 과대 평가라고 하긴 어렵지요. 그의 재임기간 전과 재임기간중의 치적을 살펴 볼 때 그의 누명이 과도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새삼 광해군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고 있으며 방송에서도 광해군에 대하여 여러번 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진시왕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만리장성을 얘기하면 만리장성을 마무리한 진시왕을 떠 올리게 됩니다. 60여년전의 6.25에 대하여도 그당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이 많이 생존하고 있음에도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상황이니 몇 백년 전의 일을 명확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역사 학자들도 각자 자기들의 입장과 이해에 맞게 역사를 평가하고 있으니 어차피 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수 밖에 없겠지요.
    내가 그일에 대하여 나쁘다는 인식이 깊게 심어져 있으면 아무리 좋은 점을 얘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평가 역시 자기가 보는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지 않나요?
  • MS Jung 2015/08/15 15:32 # 삭제 답글

    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했다느것은 이해하기 힘드네요. 대동법을 추진하니까 그것이 불만인 사람들이 반정을 일으킨것이 아닌지요.

    궁궐 신축의 여파가 어떻했는지 궁금합니다. 반정의 여러가지 명분은 핑계로 생각되고 궁궐 신축이 나라를 망칠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교수는 국가 예산의 15-25%에 달하는 금액이 들었다는데 반정때문에 궁궐 신축이 중단되었으니 큰 부작용은 없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중립외교도 어쩌다보니 증립외교같이 되었다 주장하는사람도 있는데 확실한 중립와교의 증거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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